지난 2년 간은 주로 나무와 숲, 생태에 관한 책을 읽었다. 시끄러운 인간 세상살이보다 말 못 하는 나무와 풀, 자연 이야기가 읽기도 편하고 마음을 두기 편했다. 나무가 자라는 이야기, 나무마다 생태와 구별하는 법, 숲속을 걷고 자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먼 나라로 트래킹을 떠난 이야기. 그러나 두어 달 전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나무, 자연, 여행 이야기를 다룬 책을 읽을 수 없다. 억지로 읽으려 해도 잘되지 않는다. 그렇게 마음을 편히 해주던 책이 이젠 그렇게 편하지 않다. 펼쳐볼 엄두가 나지 않을 때도 있다. 이미 마음에 다른 것이 그득하게 차 있기 때문이다. 전에 즐겨 보던 책을 펼쳐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이 콩닥거린다. 다른…
대입 논술고사를 치르러 도착한 대학교 정문 앞은 가시지 않은 매캐한 최루탄 내음으로 숨을 쉴 수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맡아보는 괴로운 공기. 최루탄 내음처럼 처음 몇 달간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낯설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은 5.18 광주의 진실이었다. 봄볕이 가득한 광장 화단을 따라 게시판에 붙은 사진 속 1980년 5월 광주의 모습은 숨을 멎게 하고 점심으로 먹은 것을 토해내게 했다. 눈물이 흐르고 심장은 쿵쾅거리고 흑백 사진 이외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기숙사 방 책상에 앉아 밤을 지새며 스스로에게 묻고 하늘에 계신 분께도 물었으나 이게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인지, 그리고 사람들은 어떻게 까맣게 모르고 편히 잠들고 살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요즘 여러 지역 작은 도서관이 지자체의 예산 삭감으로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는다. 고양시, 동두천시 작은 도서관이 줄줄이 폐관하고, 마포구에서는 폐관을 추진하다가 주민들의 반대에 계획을 물렸다. 이 과정에서 폐관 이유를 주민들에게 설명하거나 의견을 듣는 아주 기본적인 소통도 전혀 없었다. 도서관 폐관을 하려는 지자체장들은 지역에서 도서관의 역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이 학창시절 다니던 도서관, 그러니까 도서관을 자신들이 경험한 입시 공부를 하는 독서실 같은 곳으로 여기는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가끔이라고 집 가까운 곳에 있는 공공도서관에 몇 번만 가봤다면 도서관에서 얼마나 많은 일이 이루어지는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모를 수가 없다. 우리 동네 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기만 해도 독서…
어제 행주산성에 다녀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바닥엔 낙엽이 비단처럼 깔린 오르막길을 올랐다. 산성 위엔 높다란 기념탑이 솟아 있으나 그 아래로는 빗물과 뿌연 안개로 어렴풋이 한강의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수없이 아침과 밤, 이 곁을 지나다녔지만, 가까이 있으면 공기처럼 당연한 듯 오히려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다 무언가 이유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오게 된다. 지난 10월에 전남 구례에서 열린 ‘지리산둘레길 걷기 축제’ 에 가서 걷다 매천사에 들러 산 시집 「매천 황현 시선 梅泉 黃玹 詩選」에 ‘강 건너로 행주산성을 바라보며(隔江望幸州)’란 시가 실려 있다. 이 시는 나라 이름이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뀐 1899년에 지은 시다. 구례에서 지내던 황현 선생이 도탄에 빠진 나라를 바로 잡을 개혁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리기…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 배달된 종이상자에서 책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고 보니, 다섯 권의 책이 크기도 다르고 분야도 제각각이다. 시집, 과학, 스포츠, 순례기, 식물 백과사전. 한 해 동안 산 책을 생각해 보니 이런 식으로 맥락 없이 책 사는 것도 버릇 같다. 관심사가 산만해서인가?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굳이 어울릴 필요도 없지만) 분야 책들을 같이 주문하곤 한다. 그래도 종이로 된 책을 산 것은 오랜만이다. 해마다 새로 책을 사서 쌓아두다 보면 어느샌가 둘 곳이 마땅치 않다. 그러면 책장에서 이제 안 볼 것 같은 책들을 골라내 기부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책값을 감당하기도 어렵고, 아까울 때도 있다. 대개 한 번 읽고 말 뿐인데, 이것도 욕심이고 사치가…
1894년은 저절로 떠오르는 역사적 사건이 몇 가지 있다. 갑오농민전쟁, 갑오경장. 배운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잉크로 새긴 것처럼 연도를 들으면 따라 생각난다. 1894년은 또한 우리 땅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군에 경복궁이 점령당하고(갑오왜란), 김홍집 꼭두각시 정권이 들어서며 일본의 침략과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그렇다. 오늘도 우연히 한 자료에서 1894란 숫자와 사진 한 장을 보았다. 1894년 일본군이 인천 제물포에 상륙하는 사진이다.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위기를 느낀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고 청나라는 톈진조약에 따라 이를 일본에 통보하자 일본은 즉각 8천의 군대를 한반도로 파병한다. 같은 해 6월 12일과 16일 제물포항으로 상륙한 일본군은 곧장 용산에 집결하였다. 이미 6월 6일…
미국 외교 전문지 ‘디플로맷(The Diplomat)’은 8월 7일 “한국의 지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일본 사도 금광(Japan’s Sado Island Gold Mines Designated as UNESCO World Heritage Site With South Korea’s Backing)”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의 부제목은 “일본과 한국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외교, 역사의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하며, 사도의 어두운 면을 은폐하고 있다”로 적고 있다. 제목에도 그대로 드러났듯이 사도 광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취지에 맞지 않지만, 일본 정부가 역사를 왜곡하는데 한국 정부가 한패가 되어 힘을 보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 지정 신청을 하며, 사도 광산이 에도 시대의 문화적, 기술적 유산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 이후,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쟁 수행…
뉴스를 잘 찾아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세상 소식을 남보다 늦게 아는 경우가 많다. 아침 사무실에 나와 차를 마시고 의자 깊숙이 기댄 채 한참 게으름을 떨다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는데 구석 작은 뉴스 알림에 ‘김민기 별세’라는 작은 글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마우스를 클릭하자 그의 소식이 화면을 채운다. 다섯 글자를 큰 활자로 그의 죽음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의자에 쓰러지는 몸을 묻었다. 갓 대학생이 된 나는 교정과 시장 술집, 과사무실에서 듣게 된 노래는 대부분 그때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TV와 라디오에서 듣던 노래는 지나는 길가 가게에서나 들을 수 있었고, 나는 생소한 노래들에 익숙해졌다. 소위 데모가로 불리는 노래와는 결이 다른…
나는 중, 고등학교를 고향 집과 외가 이모, 외삼촌 집을 오가며 다녔다. 중학교 2학년 때던가, 어느 날 마을에서는 떨어진 외딴집이던 고향 집에서 가장 가까운 또 다른 외딴집인 교회 사택에 새로 목사님과 가족이 이사를 왔다. 아버지가 얘기를 해주셨다. 학교 가는 버스를 타려면 교회 앞을 지나야 했는데 어느 날 아침 처음 보는 어른이 교회 앞 마당에 계셨다. 꾸벅 인사를 하자 웃는 얼굴로 손을 들며 인사를 받아주셨다. 그 후로도 학교 가는 길 자주 목사님을 뵈었고 늘 그렇듯 나는 말없이 꾸벅 인사를 했다. 가끔은 어디 사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물어보셨다. 또 다른 것도 물어보신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아침에 자주 달리기를 했다.…
37년이 되었다.달력을 보고도 깨닫지 못했다. 오늘이 37년 된 그날인 것을.“6.10민주항쟁”그해 여름이 있었기에 민주주의를 다시 찾아올 수 있었는데, 이날을 기념하지 않는 것은 부정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지.기억하는 자는 조용히 숨죽여 기억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자는 큰 소리로 깽판 치는 세상.37년 전 스무 살 청춘이 거리에서 외치고, 넥타이 맨 아저씨와 장사하는 아주머니가 박수치던 그날이 왜 있어야 했는지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하고 두려워할 자는 두려워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