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 관측 이래 가장 긴 열대야를 기록한 올여름. 추석이 한 주도 안 남았는데 밤이 되어도 더위에 잠을 이루기 어렵다. 올해만 유난히 더운 게 아니라 앞으로 해를 더할수록 더 더워질 거라고 한다. 그래서 어쩌면 앞으로의 여름 중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한다. 더운 날이면 시원한 곳을 찾게 마련이다. 매일 밤 시원한 곳을 찾아갈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는 거야 자유가 아니겠는가. ‘지금 어디에 있으면 좋을까?’, ‘오늘 밤 어디서 자면 좋을까?’ 양구 펀치볼. 딱 한 번 가본 곳이다. 7월 중순이었으니 그때도 여름이었다. 몇 해 전 DMZ 트레일이 만들어져 시범 운영할 때 탐방단으로 뽑혀 이틀간 이 길을 걸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 산에는 불교 사찰이 참 많은데, 지리산둘레길에서는 사찰을 보기 쉽지 않다. 서암정사, 벽송사가 있고 화엄사를 가까이 지나간다. 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사찰을 가로질러 가는 곳이 딱 한 군데 있는데 단속사가 있던 자리다. 둘레길에서 마주할 곳들을 미리 공부하고 떠났으면 좋으련만 무작정 걷다 이름난 곳들을 마주하고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살핀다. 지리산둘레길 성심원-운리 구간을 걷다 운리마을 조금 못 미쳐 지금은 터만 남은 단속사를 지난다. 이곳에는 산청의 유명한 3대 매화중 하나로 꼽히는 ‘정당매(政堂梅)’가 있다. 절터 한쪽에 돌에 새긴 알림판이 있다. 정당매(政堂梅)이곳 정당매는 통정공 회백(通亭公 淮伯) 선생과 통계공 회중(通溪公 淮仲) 형제분께서 沙月里 五龍골에서 출생하시어 유년 시절 지리산 자락 신라 고찰 단속사(斷俗寺)에서 修學하실 때 手植한 梅花나무다.그 후…
지리산둘레길은 산과 들, 자연의 길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길이다.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고 숲과 물길, 자연과 사람을 잇는 길이다. 그래서 길이 이어지는 곳 어디나 사람의 살아온 흔적이 없는 곳이 없다. 그 흔적 중에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슾프기 그지없고 멈춰 서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곳도 많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마을에서 광의면 방광마을을 걷는 구간도 그러하다. 오미에서 시작한 길은 방광마을에서 한 구간 매듭을 짓는다. 방광마을 아래 용전마을이 있고 그 아래 마을 논에 물을 대는 저수지 방광제가 있다. 그 아래 매천사가 있다. 매천사는 우국지사 매천 황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9월 10일은 매천 황현 선생이 순국한 날이다. 1910년 8월 29일 우리…
어쩌면 지리산둘레길 모든 구간에서 가장 뜻밖의 경험이랄까.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을 딱 맞닥뜨렸을 때 겪게 되는 느낌이었다. “이런 게 여기 있다고?” 지리산둘레길 위태-하동호 구간 중간 조금 지난 곳이다(경남 하동군 옥종면 양이터재). 콘크리트로 포장한 임도 내리막길 한쪽에 부서진 자전거가 쓰러져 있다. “누가 이런 데 자전거를 버렸나.” 혼잣말했는데 바닥에 금속 푯말이 붙어 있다. 우주사고Artist 2창수 지구 이외의 것에도 생명이 있다는 상상은 이티를 통해 시작되었다. 어른이 된 2015년 외계인의 실체를 보고 싶은 마음에 지리산으로 ET를 초대했다. 영화에서처럼 자전거를 타고 지리산으로 오던 ET는 불행히도 절개지에 부딪혀 사망한다. 사고 원인은 이전에 그려놓은 지형이 달라져 없던 절개지가 생겼기 때문인데 인간 편의의 방법이 우주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그러나…
짚신나물, 모시대, 물봉선큰뱀무, 둥근이질풀, 동자꽃원추리, 어수리, 참취곰취, 노루오줌, 갈퀴덩 8월 지리산을 오르는 것은 쉽게 엄두를 낼 수 없다. 아무리 지리산이 좋아도 8월 땡볕 더위는 피하는 게 좋다. 그런데도 지리산에 오르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노고단이다. 성삼재까지 차로 오를 수 있지 않았다면 애초에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 몇 년 전 그때도 8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높이 태양이 눈 부시던 날, 백무동에서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에 올랐던 적이 있다. 더위를 피해 새벽에 올랐기 망정이지 한낮이었다면 오르다 포기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오늘은 이미 온도계가 30도를 넘긴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다. 기어가도 한 시간이면 오르니, 쉬엄쉬엄 가면 이 더위도 별거 아니라고 여기도 오르기…
지리산둘레길을 걷는 순례자 쉼터인 궁항마을 새참사랑방이 문을 닫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지난가을 듣고 다른 쉼터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지리산에서 만나는 쉼터는 궁항마을 쉼터처럼 지리산둘레길 운영을 맡고 있는 사단법인 숲길이나 산림청에서 나서서 만든 곳도 있지만, 마을이나 개인이 만들고 운영하는 곳도 있다. 크기와 운영 형태도 똑같지는 않다. 개인이 운영하는 쉼터는 쉼터라고 할 수도 있고 가게라고 할 수도 있다. 사람이 있는 곳도 있고 사람 없이 운영하는 곳도 있다. 흐르는 계곡물에 음료수, 맥주를 담가 놓고 돈통 하나 옆에 둔 게 전부인 무인점포도 있다. 대봉감을 기르는 과수원 한편에 냉동고를 놓고 얼린 감을 파는 점포가 있는가 하면, 근사한 정자를 순례객이 쉬어가라고 내어놓은 쉼터도 있다. 큰 마을을 지나지 않는…
지리산둘레길 주천-운봉 구간을 걷다 보면 덕산저수지 못 미쳐 노치마을을 지나게 된다. 지리산둘레길 종주를 하는 사람들은 남원시 주천에서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주천-운봉 구간을 1코스라고 흔히들 부른다(지리산둘레길에 구간에는 공식적으로는 순번이 없다). 그러니까 둘레길을 걷기 시작해 개미정지를 지나 첫 번째 고개를 넘고 땀을 좀 흘린 다음 한숨 쉬어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도착하는 곳이 회덕마을이고 그다음이 노치마을이다. 이 구간을 걷는 순례자들은 지리산 서북 능선을 바라보며 걷게 되는데, 지리산 서북 능선은 백두대간의 일부로 노치마을에서 지리산둘레길과 만나게 된다. 노치마을은 지리산에서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 1,600km에서 유일하게 가로지르게 되는 마을이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노치샘 뒤로 등산로 입구가 있는데, 이리 오르면 백두대간길로 수정봉, 여원치로 이어진다. 이…
지리산둘레길 하동 궁항마을 순례자 쉼터를 추억하며. 지리산둘레길 위태~하동 구간을 걷다 보면 궁항마을을 지나게 된다. 행정구역으로는 경남 하동군 금성면 궁항리다. 위태에서 출발하여 작은 고개 두 개를 연거푸 넘어 내려오면 푸른 논밭과 함께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는 궁항마을에 닿는다. 2019년 9월, 낮에는 아직 여름 못지않은 더위로 이마와 옷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쉴 자리가 절실할 때, 마을회관 벽에 걸린 ‘지리산둘레길 새참 사랑방(지리산둘레길 순례자 쉼터 2호)’이라 적힌 이름 판을 발견했다. 이전에 한 번 쉼터를 거쳐 온 적이 있어서 이곳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곳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마을회관 옥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자, 옥상에 철제 구조물로 지붕을 하나 더 올려 햇볕을 가린 널찍한 공간이 있었다.…
속리산 국립공원에는 문장대, 천왕봉을 오르는 코스 말고도 여러 등산 코스가 있다. 화양계곡을 따라 늘어선 도명산, 낙영산, 가령산을 한 바퀴 둘러오는 코스가 있으니, 산을 좀 다닌다는 사람들은 ‘가무낙도 종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는 사실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코스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걷다 보니 그 길을 걸은 적이 있다. 단풍철이면 사람들로 북적이는 법주사에서 오르는 길이 아닌 한적한 곳을 찾다 보니 도명산과 친하게 되어 몇 번을 오른 적이 있다. 화양계곡을 따라 걷는 길은 산과 물이 맞닿아 있고 경치가 아름다워서 조용히 생각에 잠겨 걷기 참 좋았다. 그러다 경사길을 오르기 시작해 천천히 쉬엄쉬엄 걸어 두어 시간이면 도명산 정상에 이른다. 등산과 산책을 겸해 하루에 다녀오기가 이보다…
연일 장맛비로 맑은 하늘을 본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가끔 몇 걸음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비가 쏟아질 때도 있지만 대개는 우산만 있으면 걷기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되풀이한다. 오히려 비가 내리는 동안에는 더위도 견딜 만하다. 한여름에 산길을 걷기는 쉽지 않다. 살갗을 찌르는 듯한 햇볕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금세 숨을 막히게 하는 습한 공기다. 더운 기온에 몸은 열을 식히려고 열심히 피부 모든 모공으로 땀을 뿜어내지만, 체온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공기는 이미 습기를 잔뜩 머금어 땀을 말리지 못하고 피부를 따라 그대로 흐르게 한다. 그래서 차라리 구름 끼고 적당한 비가 내리는 날이 걷기 좋다. 비를 맞으며 하는 등산을 ‘우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