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치볼에서 보낸 여름밤

기상 관측 이래 가장 긴 열대야를 기록한 올여름. 추석이 한 주도 안 남았는데 밤이 되어도 더위에 잠을 이루기 어렵다. 올해만 유난히 더운 게 아니라 앞으로 해를 더할수록 더 더워질 거라고 한다. 그래서 어쩌면 앞으로의 여름 중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한다.

더운 날이면 시원한 곳을 찾게 마련이다. 매일 밤 시원한 곳을 찾아갈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는 거야 자유가 아니겠는가. ‘지금 어디에 있으면 좋을까?’, ‘오늘 밤 어디서 자면 좋을까?’

양구 펀치볼. 딱 한 번 가본 곳이다. 7월 중순이었으니 그때도 여름이었다. 몇 해 전 DMZ 트레일이 만들어져 시범 운영할 때 탐방단으로 뽑혀 이틀간 이 길을 걸은 적이 있다. DMZ 트레일을 걸었고, 밤에는 국립 DMZ 자생식물원 뜰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잤다. DMZ 자생식물원은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일명 펀치볼로 알려진 곳에 있다. 1,100미터가 넘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화채 그릇 안에 들어앉은 모양 같다고 펀치볼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다. 포탄이 무수히 날아다니던 한국전쟁 때 붙은 이름이니 낭만적이라고 할 사연은 아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그 밖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곳. 산에 막혀서일지 바람도 기온도 산 너머와는 다르다. 아침이면 안개가 드라이아이스 연기처럼 분지 안을 가득 채운다. 한낮에 햇살은 따갑지만 해가 산을 넘어가면 쌀쌀함에 긴 옷을 찾게 된다. 또 다른 것은 밤이 찾아오면 적막하다는 것이다. 전자제품 화이트 노이즈처럼 윙윙거리는 도시의 밤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적막한 밤은 서늘한 공기를 더 차갑게 느껴지게 한다.

검게 둘러싼 산은 하늘과 땅을 가르고 하늘에 박힌 무수한 별은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잊고 있던 어린 시절 밤하늘 그대로다. 요즘 아이들은 본 적 없다는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 텐트 입구를 열어 놓고 밤하늘을 보다 옷을 뚫고 들어오는 추위에 텐트 지퍼를 올리고 잠을 청한다.

흙 위에 친 작은 텐트 속 얇은 침낭에서 웅크리며 잤지만,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그리고 해가 뜨기 전 이른 아침에 개운하게 눈을 떴다. 체온을 올리려고 살을 비비고 양털 셔츠를 뒤집어쓰고 텐트 밖으로 나와 걸었다. 서늘한 공기 속 여름 아침은 들판을 하얗게 덮은 안개로 신비롭고 환상적이다. 해가 산 위에 떠오르고 안개가 사라질 때까지 들판과 밭길을 걸었다.

‘양구 펀치볼에 가면 잘 잘 수 있겠지? 요즘 같은 밤에도.’ 모를 일이다. 그곳도 열대야로 잠 못 이루고 있을지도. 그렇지만 기억 속 그 여름밤을 생각하니 그곳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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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S. LEE. I’m a hiker and dream of one day spending most of my time on long distance trails. I love to breathe in nature and think about how humans can live in harmony with nature as part of a community of life. Sometimes I talk about music, movies, and books with my friends.
This a my life log, nothing special, but I hope you’ll join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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