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의 그곳] 매천사

지리산둘레길은 산과 들, 자연의 길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길이다.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이고 숲과 물길, 자연과 사람을 잇는 길이다. 그래서 길이 이어지는 곳 어디나 사람의 살아온 흔적이 없는 곳이 없다. 그 흔적 중에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슾프기 그지없고 멈춰 서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곳도 많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마을에서 광의면 방광마을을 걷는 구간도 그러하다. 오미에서 시작한 길은 방광마을에서 한 구간 매듭을 짓는다. 방광마을 아래 용전마을이 있고 그 아래 마을 논에 물을 대는 저수지 방광제가 있다. 그 아래 매천사가 있다. 매천사는 우국지사 매천 황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9월 10일은 매천 황현 선생이 순국한 날이다. 1910년 8월 29일 우리 민족은 일제와 매국노들에 의해 나라를 빼앗겼다(경술국치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매천 선생은 나라를 빼앗김에도 나라 위해 죽는 벼슬아치는 없고 나라 팔아먹는 간신만 우글거리는 것을 한탄하며,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

황현의 초상화(채용신 그림)

매천 선생에 관해서는 학교 역사 시간에도 자세히 가르치지 않는다. 어디 매천뿐인가. 사실 대부분의 순국선열에 할애하는 시간은 이토 히로부미보다 적다. 요즘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영웅시하기까지 하고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맞아 죽은 것은 안타까워하는 자들이 버젓이 TV에까지 출연한다니 어찌 매천 선생이 통탄하던 그때보다 나아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면 곳곳에서 아픈 역사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길 바로 옆이 아니라면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지리산둘레길을 소개하는 공식, 비공식 자료와 책자도 마찬가지다.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에서 만나는 지난 역사의 실상은 충격이었다. 책으로 배워 알고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희생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을 두 눈으로 목격하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감정을 일으키고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오랜 시간을 거슬러 갈 것 없이 해방 전후, 한국전쟁 시기만 보더라도 지리산둘레길 거의 모든 구간이 학살의 현장을 품고 있다. 이 나라 땅 어디 하나 예외가 없었다는 것이 맞겠으나 지리산 둘레는 모진 역사의 흔적이 어느 곳보다 깊다.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며 바라보는 산과 강, 들판은 아름답고 평화롭기만 하다. 이런 곳에 살면 법도 필요 없을 것 같고 사람들과 다투는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불과 수십 년 전 이 땅에서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땅을 부치며 살던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했다니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인가. 또 바로 전 수십 년은 나라를 통째로 왜놈들에게 빼앗기고 수탈에 죽임까지 당했으니, 지금의 하늘과 땅은 과연 그때도 푸르고 아름다웠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쉽게 말하지만, 우리는 잊지 않으려 하고 있는가. 누가 나서서 해야 하는가. 이미 잘 알고 있다. 정부를 비롯해 한 개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유린당하여 엉망이 된 역사를 바로잡지 못한 결과, 매국노들이 역사를 왜곡하는 퇴행을 밝은 하늘 아래에서 뻔뻔하게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은 매국노들의 짓을 방관하는 것이다.

매천 황현 선생이 나라 빼앗긴 소식을 듣고(문변 聞變 – 변고를 듣다), 한탄하는 것이 지금과 다를 게 무엇인가. “독도를 한국 땅이라고 할 수 없다.”, “식민 시대라서 근대화를 이루었다.”, “일제 식민 시대가 더 살기 나았다.”. 한 세기 만에 또다시 ‘변고’를 들을까 두렵다.

문변삼수 聞變三首

洌水呑聲白岳嚬(렬수탄성백악경빈)
한강도 소리 죽이고 백악산도 얼굴 찡그리는데

紅塵依舊簇簪紳(홍진의구족잠신)
이 세상에는 여전히 벼슬아치만 우글거리네

請看歷代姦臣傳(청간역대간신전)
역대 간신전을 읽어 보게

賣國元無死國人(매국원무사국인)
나라 위해 죽었다는 매국노는 원래 없지

지리산둘레길이 아름다운 자연의 길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길임을 더 느끼고 알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이 길로 이어지는 땅에서 우리 민족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할 수 있는 길이 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길에 얽힌 역사를 가까이 접하고 느낄 수 있는 길잡이를 다양하게 궁리해야 한다. 길잡이만 있으면 나머지는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몫이다.

나라를 빼앗김에, 이 땅에 매국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죽음으로 보여주기를 결심한 선생의 마음을 절명시 4편으로 되새겨 본다.


절명시 1
亂離滾到白頭年 (난리곤도백두년) 난리 속에 어느덧 백발나이 되었구나
幾合捐生却未然 (기합연생각미연) 몇 번이나 죽어야 했지만 그러하지 못했네
今日眞成無可奈 (금일진성무가내) 오늘에야 참으로 어쩔 수 없게 되었으니
輝輝風燭照蒼天 (휘휘풍촉조창천) 가물거리는 촛불 저 하늘 환히 비추네

절명시 2
妖氣掩翳帝星移 (요분엄예제성이) 요사한 기운 가리워 황제 별자리 옮기니
九闕沈沈晝漏遲 (구궐침침주루지) 구중궁궐은 적막하고 시간조차 멈추었네
詔勅從今無復有 (조칙종금무부유) 황제조칙 이제는 다시 없을 터
琳琅一紙淚千絲 (임랑일지루천사) 종이 한 장 쓰는 시에 천 줄기 눈물

절명시 3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산하도 찡그리니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세상은 이제 망해버렸네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역사 돌아보니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인간세상 글자 아는 사람 노릇 쉽지 않았네

절명시 4
曾無支厦半椽功 (증무지하반연공) 나라를 위해서는 조그만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 (지시성인불시충) 나의 도리 다한 것일 뿐 충성은 아니로세
止竟僅能追尹穀 (지경근능추윤곡) 자결했던 윤곡을 이제 겨우 따를 뿐
當時愧不躡陳東 (당시괴불섭진동) 논쟁했던 진동처럼 못했던 게 부끄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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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S. LEE. I’m a hiker and dream of one day spending most of my time on long distance trails. I love to breathe in nature and think about how humans can live in harmony with nature as part of a community of life. Sometimes I talk about music, movies, and books with my friends.
This a my life log, nothing special, but I hope you’ll join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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