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을 걷던 날이다. 여름휴가로 며칠간 떠나온 참이다. 장마가 끝나고 한창 7월 말이었다. 한낮에는 푹푹 찌는 공기와 뜨거운 햇살에 걷는 게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더위를 피해 날이 밝기 시작하는 이른 새벽부터 걷기 시작했다. 며칠 걷자 몸은 걷는 데 익숙해졌지만, 선크림을 바르지 않은 살갗 여기저기 빨갛게 익어 스치기만 해도 쓰라렸다. 하루만 더 걷고 돌아가야지 하는데 발길은 성산 일출봉 앞에 닿았다. 일출봉을 빠른 걸음으로 올랐다 내려와 올레길로 이어지는 길은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아침 시간임에도 견디기 힘들게 쓰리고, 따가웠다. 광치기해변에 이르자 돌담에 모래사장 한편에 쓰라린 시구가 돌에 새겨져 있다. ‘아, 이곳에서도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구나’ 알 수 있었다. 흔적이 이어진다. 제주 4.3 성산읍지역 양민 집단학살의…
덕유산을 떠올리면 늘 커다란 자연의 품이 연상된다. 이름에서도 느껴지는 것처럼 산은 넓고 크고 깊고 높다. 지리산보다 가까우면서도 자주 찾지 못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거리는 지리산보다 가까우나 산에 이르는 길은 쉽지 않다. 대중교통으로 가기에도 편하지 않고, 차를 가져간다고 해도 원점 회귀가 아니라면 돌아오기는 어렵긴 마찬가지다. 다른 국립공원 큰 산을 갈 때보다 더 준비하고 챙겨야 한다. 푸근한 이미지 때문에 설렁설렁 갔다가는 곤욕을 치르기 쉽다. 특히 겨울엔 강원도 산골보다 더 큰 눈을 만나고 소백산 겨울바람 같은 칼바람도 각오해야 한다. 겨울보다는 여름이 나을까? 여름에는 눈에 파묻히거나 추위와 바람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일은 없다. 넉넉한 물과 적절한 체력 안배만 한다면 짙푸른 녹음과 무주구천동 계곡의 시원한…
몇 년 만에 사패산에 올랐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코로나 대유행 이전에 오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날도 요즘처럼 해가 긴 여름이었다.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직원과 같이 퇴근하다 아직 해가 눈부시게 밝은 것을 보고 ‘산에나 갔다 갈까?’ 하는 말로 송추계곡 입구로 향했다. 북한산국립공원 송추계곡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구두에 양복바지, 흰 셔츠 차림으로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의 기억은 늘 왜곡되기 마련이어서 이전에는 한 시간 만에 후딱 올라간 느낌이었는데 생각보다 길고 가파르다. 셔츠가 흠뻑 젖어 꼴사나운 모습에 서로 웃으며 정상에 섰다. 해가 곧 붉고 누런빛으로 변하리라. 그날따라 유독 하늘빛이 선명하여 석양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내려오는 길 어둠이 두려워 서둘러 아래로…
꼬맹이 때 친구들과 어울려 산에 올랐던 기억 말고 몸이 커진 후 어떻게 산에 오르게 되었는지, 등산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기억이 뚜렷하지 않다. 고등학교 3학년 대입 학력고사가 끝난 후 졸업까지 학교생활은 한없이 여유롭고 3년 내내 사납기만 했던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순한 양이 되고 심지어 인자하기까지 했다. 그런 날이 이어지던 어느 날 옆 반이던 친구와 속리산에 가게 됐다. 누가 먼저 가자고 한 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왜 하필 속리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가장 가까운 이름 있는 큰 산이었기 때문에 당연하게 그리한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입던 점퍼와 청바지, 운동화에, 산에 간다고 그마다 더 챙긴 게 목도리와 장갑 정도였던 것 같다(나중에 사진을 보니 그렇다).…
청주 상당산성은 지금 남아 있는 옛 산성중 원형이 잘 보존 편이다. 삼국시대 성이 만들어진 후 조선 숙종 때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쌓고 영조 때 보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주는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서 다섯 개의 큰 도시 중 하나로 행정으로나,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상당산성은 청주성의 배후 산성으로 역할을 하였는데, 조선시대에도 임진왜란, 이인좌의 난 때 주요 거점이 되었다. 상당산성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고 보존되는 데는 한 장의 지도가 큰 역할을 하였다. 전남 구례에 있는 문화 류씨 가문 종택인 ‘운조루’에서 조선시대 그린 청주성과 상당산성 지도가 발견되었는데, 성의 규모와 외형, 건물의 배치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복원 작업을 할 때 지도에 표시한 위치에서 같은 규모의 건물터가…
감악산 까치봉 아래 툇마루 닮은 작은 터, 도봉산 여성봉 옆 바위, 한강 하구와 마주한 검단산 산허리. 자주 올라 혼자 시간을 보내는 곳들이다. 다른 사람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훤히 펼쳐진 자연을 마주하고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겹겹이 층을 이루고 아득히 펼쳐진 봉우리와 출렁임이 보이지는 않지만 거대한 움직임으로 흘러가는 강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하는 생각, 고민, 감정이 작고도 단순하게 느껴진다. 살아가며 어찌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한 가지 생각에 하루 종일 사로잡혀 끙끙거리기 일쑤인데, 사실 결정을 내리지 못해 망설일 뿐 답은 이미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람과 얽힌 생각이 대개 그렇다. 생각하기 싫어, 선택하지 못해, 미련이 남아 주저하고 뒤로 미루어…
옛 한양 성곽을 따라 걷는 한양도성길은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으로 이어져 서울 시내를 바라보며 숲길을 걸을 수 있는 특별한 곳이다. 서울 시내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첫 번째 특별함이라 할 수 있다. 한양도성길 중에서도 나는 살던 곳과 가까운 인왕상~북악산 구간을 자주 찾는다. 여름철이면 하루 일을 마친 후에도 해가 지기 전 충분히 다녀올 수 있어서 다른 계절보다 더 자주 도성길을 걷는다. 붉게 물든 해가 거대한 도시와 산이 함께 이어진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풍경은 뿌듯함으로 가슴을 채우는 아름다운 광경이다. 한양도성길을 걸으며 만나는 또 다른 특별함은 계절마다 갖가지 예쁜 들꽃을 보는 것이다. 성곽길은 대부분 양지바른 곳이어서 길가에 때로는…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는 가장 짧은 탐방로인 중산리 코스. 아마 나뿐 아니라 천왕봉을 오르는 이들이 가장 많이 거치는 길일 것이다. 내가 처음 지리산을 오르고 천왕봉을 향했을 때도 중산리에서 출발했다. 요즘 계절 지리산 풍경을 떠올리다 문득 중산리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중산리 탐방안내소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걷고, 산에서 내려올 때도 서둘러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싣는 게 흔한 모습이다. 가장 많이 걸은 코스지만 사실 나는 이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 장터목과 천왕봉에 이르는 가장 잘 알려지고 가까운 길이라서 이 길을 걷지만 걷는 내내 급한 경사와 고르지 못한 험한 바윗길은 괴롭기만 하다. 더구나 계곡 길이라 장엄한 지리산 풍경을 시원하게…
주말이면 산에 즐겨 오르면서도 등산에 관해 제대로 배운 것이 없어 여러 번 마음이 구차해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러다 몇 해 전 국립등산학교의 교육생 모집 공고를 보고 과목을 보니 참 유익하다 싶어 기쁜 마음으로 신청하고 ‘등산’ 공부를 몇 달간 하였다. 모든 학문이 그렇지만 과정 앞부분에서 등산의 기원을 살피는 시간이 있었다. 18세기 유럽의 ‘알피니즘 Alpinism’을 근대 등산의 시작점으로 삼고 우리나라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을 통해 전파된 것이란 내용이다. 알피니즘 태동 이전 유럽인에게 산이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알프스 몽블랑을 오르며 근대적 등산의 개념인 알피니즘이 형성되고 널리 퍼진 것이란 설명은 유럽인에게는 당연하게 들릴 수 있겠으나, 유럽도 아니고 유럽인도 아닌 우리가 이것을 우리 등산의 기원으로 보는 것은…
전남 구례 섬진강 지류인 서시천을 따라 대나무숲과 숲길이 조성되어 있다. 사성암이 있는 오산 건너편이다.죽순대(맹종죽)가 숲을 만들고 그 사이로 길을 내어 주민과 관광객이 제법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지리산둘레길 소풍 행사 때 이 길을 처음 걸은 후 구례와 지리산을 찾아올 때면 자주 들르는 곳이 되었다.여느 숲길과 달리 대나무 숲길은 하늘 높이 쭈욱 자란 대나무가 시원하고 바람에 잎사귀들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마음의 잡념을 쓸어내는 소리로 들린다.이번 달 초 성삼재에서 천왕봉, 중산리까지 종주하기 전 이곳 섬진강 대나무 숲길을 찾았다. 아, 그런데 이상하다. 얇고 푸른 잎이 자라 있어야 할 가지마다 익어가는 수숫대같이 무언가 잔뜩 달려있다. 눈을 가까이 대고 살펴보니 잎이 아니다. 꽃이다. 한참을 걸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