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내어라. 우리가 세상을 이겼다.”

대입 논술고사를 치르러 도착한 대학교 정문 앞은 가시지 않은 매캐한 최루탄 내음으로 숨을 쉴 수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맡아보는 괴로운 공기. 최루탄 내음처럼 처음 몇 달간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낯설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은 5.18 광주의 진실이었다. 봄볕이 가득한 광장 화단을 따라 게시판에 붙은 사진 속 1980년 5월 광주의 모습은 숨을 멎게 하고 점심으로 먹은 것을 토해내게 했다. 눈물이 흐르고 심장은 쿵쾅거리고 흑백 사진 이외는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기숙사 방 책상에 앉아 밤을 지새며 스스로에게 묻고 하늘에 계신 분께도 물었으나 이게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인지, 그리고 사람들은 어떻게 까맣게 모르고 편히 잠들고 살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며칠 뒤 80년 5월을 광주에서 중학생으로 보내고 늦깎이로 대학에 들어온 옆 방 형을 졸라 그날의 이야기를 들었다. 헬기에서 쏘아대는 기관총이 방안에 날아들고 친구가 죽고 계엄군이 대검 꽂은 총을 들고 거리를 헤집고 다니던 그때 이야기를.

비가 내려 진흙탕에 신발이 푹푹 빠지는 망월동 묘지에서 묘비에 적힌 이름과 나고 죽은 날짜를 보며 사진 속 끔찍한 죽임이 그제야 사실로 다가왔다.

시간이 수십 년 흘러도 ‘계엄’이라는 단어는 기억 저편에서 잊고 싶은 기억과 공포를 끄집어낸다. 이 단어는 일상에서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역사책 속 활자로만 남겨지길 바라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를 현실로 소환자 자들이 있다. 살이 떨리고 피가 거꾸로 솟는다. 우리 부모 세대는 전쟁의 공포에 군사 독재도 견디는 불행한 시대를 살았다. 20세기를 역사 저편으로 보내며 우리 국민은 군사 독재의 트라우마도 함께 묻고 민주주의를 곧게 세웠다. 그런데 다시금 군사독재와 전쟁을 현실로 소환하는 대통령이라니. 어찌 세 치 혀로 불가피한 선택이라 말하는가. 정녕 이 반역자들은 우리 국민이 전쟁과 독재를 어찌 이겨내고 지금의 국민 주권 국가를 만들었는지 모른단 말인가.

국민의 가장 아픈 기억을 후벼 협박하고도 무사할 줄 아는가. 우리는 무슨 일을 겪어도 미래를 살아갈 후대에는 나은 세상을 물려주려고 기꺼이 어떤 희생도 치르는 민족이다. 반역자들의 가장 큰 실수는 우리가 어떤 민족인지 잊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또한 이겨내고 새 세상을 열 것이다.

계엄군에게 짓밟힌 남쪽 한 도시의 기록에 괴로워하는 19살 학생은 시인들의 시를 읽으며 마음을 다독이는 위로를 얻었다. 얼마 전 다시 산 고정희 시인의 시집 “지리산의 봄” 뒤표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시인의 말에 오늘 또 다시 위로를 받는다.

“아무리 우리 사는 세상이 어둡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우리가 하루를 마감하는 밤하늘에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별빛처럼 아름답게 떠 있고, 날이 밝으면 우리가 다시 걸어가야 할 길들이 가지런히 뻗어 있습니다. 우리는 저 길에 등을 돌려서도 안 되며 우리가 그리워하는 이름들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이 생각을 하게 되면 내가 꼭 울게 됩니다. 내게는 눈물이 절망이거나 패배가 아니라 이 세계와 손잡는 순결한 표징이며 용기의 샘입니다. 뜨겁고 굵은 눈물 속으로 무심하게 걸어 들어오는 안산의 저 황량한 들판과 나지막한 야산들이 내게는 소우주이고 세계 정신의 일부분이듯이, 그리운 이여, 내게는 당신이 인류를 만나는 통로이고 내일을 예비하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함께 떠받치는 하늘에서 지금은 하염없이 비가 내리고, 스산한 바람이 무섭게 창틀 밑을 흔드는 계절일지라도 빗방울에 어리는 경건한 나날들이 詩의 강물 되어 나를 끌고 갑니다.”

예수는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셨다. 그분 말씀처럼 우리는 고난에서 평화를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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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fellow hikers and friends!
I am S. LEE. I’m a hiker and dream of one day spending most of my time on long distance trails. I love to breathe in nature and think about how humans can live in harmony with nature as part of a community of life. Sometimes I talk about music, movies, and books with my friends.
This a my life log, nothing special, but I hope you’ll join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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