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에서, 매천 황현 선생을 기억하며

어제 행주산성에 다녀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바닥엔 낙엽이 비단처럼 깔린 오르막길을 올랐다. 산성 위엔 높다란 기념탑이 솟아 있으나 그 아래로는 빗물과 뿌연 안개로 어렴풋이 한강의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수없이 아침과 밤, 이 곁을 지나다녔지만, 가까이 있으면 공기처럼 당연한 듯 오히려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다 무언가 이유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오게 된다.

지난 10월에 전남 구례에서 열린 ‘지리산둘레길 걷기 축제’ 에 가서 걷다 매천사에 들러 산 시집 「매천 황현 시선 梅泉 黃玹 詩選」에 ‘강 건너로 행주산성을 바라보며(隔江望幸州)’란 시가 실려 있다.

지세가 한갓 험준한 것만 중요한 게 아님을
나는 행주에 와서 보았네.
산성이 저처럼 야트막하건만
왜놈 귀신들은 여지껏 시름겨우리.
해 저물어도 변방의 봉화는 연락이 없고
봄바람 부는 속에 한강물만 흐르네.
나라 위해 일할 뜻이 평생 있었건만
눈물 훔치는 사이 강가엔 날이 저무네.
(허경진 옮김, “매천 황현 시선”, 평민사)

이 시는 나라 이름이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뀐 1899년에 지은 시다. 구례에서 지내던 황현 선생이 도탄에 빠진 나라를 바로 잡을 개혁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리기 위해 한양에 올라왔을 때 지은 시가 아닐까 싶다.
황현 선생은 행주산성을 바라보며 300년 전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서 백성이 힘을 모아 왜군을 물리친 역사를 떠올리며, 다시 힘을 모아 외세의 침략과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는 간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황현 선생이 행주산성을 바라보며 시를 쓴 지 125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선생의 시를 읽고 선생의 죽음을 기억하며 지금의 나라를 비참한 마음으로 보게 된다. 선생이 지금 나라 꼴을 본다면 뭐라고 하실까?
선생이 1899년 쓴 상소는 아래와 같다.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정부가 해야 할 9가지 방향을 담고 있다.
놀랍지 않나? 2024년 말 대한민국이 살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나라가 망했는데도 이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것을 한탄하며, 지식인으로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스스로 끊을 수밖에 없던 우국지사의 마음을 오늘을 사는 우리는 되새겨야 할 것이다.

황현 선생이 올린 상소, 언사소(言事疏)

  1. 언로를 개방하여 명맥을 소통할 것(開言路以通命脉)
  2. 백성의 뜻을 결정하여 법령을 믿게 할 것(信法令以定羣志)
  3. 형벌을 엄하게 하여 기강을 진작시킬 것(肅刑章以振綱紀)
  4.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여 재원을 넉넉히 할 것(崇節儉以裕財源)
  5. 임금의 친척을 몰아내어 공분을 없앨 것(黜戚畹以泄公憤)
  6. 선발 제도를 엄히 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嚴保擧以進才賢)
  7. 오래 직책을 맡게 하여 치정을 문책할 것(久職任以責治效)
  8. 군제를 고쳐서 변란이 싹트지 못하게 할 것(變軍制以銷亂萌)
  9. 토지대장을 조사해서 나라 살림을 넉넉히 할 것(覈田帳以贍國計)
(기념비 부조 일부, 김세중 작품)

*** 황현 선생의 상소는 안타깝게도 고종 황제에게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한자로 13,000자에 이르는 매우 구체적이고 긴 상소였다. 당장 실행해야 할 9가지를 밝힌 게 위에 적은 것이다. 고종이 읽었다 한들 뭐가 달라졌을까 싶긴 하다만. 말로 이루어지는 개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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