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은 저절로 떠오르는 역사적 사건이 몇 가지 있다. 갑오농민전쟁, 갑오경장. 배운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잉크로 새긴 것처럼 연도를 들으면 따라 생각난다. 1894년은 또한 우리 땅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군에 경복궁이 점령당하고(갑오왜란), 김홍집 꼭두각시 정권이 들어서며 일본의 침략과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그렇다. 오늘도 우연히 한 자료에서 1894란 숫자와 사진 한 장을 보았다. 1894년 일본군이 인천 제물포에 상륙하는 사진이다.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위기를 느낀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고 청나라는 톈진조약에 따라 이를 일본에 통보하자 일본은 즉각 8천의 군대를 한반도로 파병한다.

같은 해 6월 12일과 16일 제물포항으로 상륙한 일본군은 곧장 용산에 집결하였다. 이미 6월 6일 정부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全州和約)이 맺어져 정부의 원병 파병 요청 근거가 없어졌음에도 우리 땅에 군대를 상륙한 것은 애초부터 그들의 목표가 청나라와 전쟁을 하고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용산 땅에 진을 치고 이어 7월 23일 경복궁을 대포와 총으로 점령하고 고종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일본의 꼭두각시 내각을 세운다.

일본이 우리 땅에 군대를 보내 무력으로 점령하고 전쟁을 시작한 곳이 바로 용산이다. 1894년 이후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후 이 땅을 떠날 때까지 우리를 점령하고 지배한 무력의 근거지가 바로 용산이었다. 일제가 패망한 후엔 그 자리에 미군이 들어와 우리를 지배했다.
1894년 6월 8천 명에 이르는 일본군을 이끌고 들어와 경복궁을 점령한 지휘관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로 당시 육군 소장으로 보병 제9여단장이었다. 이자는 조선에 주둔하며 청일전쟁에 참전하고 수많은 조선 군대와 백성을 살해한 자로 이후 사단장을 거쳐 대장까지 승진한다. 오시마 요시마사는 우리가 대표적 극우 총리로 기억하는 아베 신조의 진외고조부(친할머니의 할아버지)다.
이 땅을 총칼로 유린하고 우리 민족을 짓밟던 자의 후손이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하는 말은, 130년 전 남의 궁궐을 쳐들어가 왕의 목에 칼을 겨누며 조선을 청의 지배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선의였다는 그의 할아버지 말과 닮지 않았는가.

그리고 지금 오시마 요시마사와 그의 군대가 있던 자리에 일제는 우리나라를 근대화시켰으며, 중국의 위협에 맞서 일본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자가 앉아 있다.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꿀릴 것 없는 멀쩡한 집무실엔 죽어도 들어가지 않겠다고 생떼를 쓰며, 우리 땅을 침략하고 지배하던 자가 있던 곳에 굳이 있겠다고 한다. 누군가의 눈으로 보기에, 이 땅은 지켜야 할 나라가 아니라 점령하고 빼앗아야 하는 곳일 수도 있겠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나와 한 민족이고 같은 국민일 수 있을지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100년이 넘는 시간 용산은 남의 나라 군대가 주둔하던 땅이었다. 이 땅을 지배하던 일본 총독 관저가 있던 곳이고, 우리 국민들의 눈과 귀에서는 가려졌던 곳이었다. 이 땅의 역사를 알고도 이곳으로 가야만 국민과 소통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곳에서 다시금 130년 전 침략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 같다고 느끼는 건 지나친 피해의식일까?
< 일제 용산 주둔지 역사 >
| 1894. 6 | 일본군 제물포항 상륙. 용산 주둔 |
| 1894. 7 | 용산 일본군 혼성여단 경북궁 무력 점령(갑오왜란) |
| 1894. 11 | 일본군 후비보병(특수부대) 제19대대를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용산에서 출병 |
| 1904. 2 | 한일의정서 체결(일본군 군사기지 사용권 확보 |
| 1904. 4 | 한국 주차군사령부 설치(현, 웨스턴 조선호텔 인근에 있던 대관정 터) |
| 1904. 8 | 일본군, 용산일대 약 300만평의 군용지를 강제 수용 |
| 1906. 5 | 용산기지 공사를 위해 경리부 임시건축과 설치 |
| 1906. 7 | 용산기지 공사 착수 |
| 1907. 1 | 일본군 용산 군용지 118만평 최종 확정 |
| 1907. 4 | 용산 사격장 완성 |
| 1907. 6 | 하세가와가 러일전쟁 잉여금으로 일본군사령관저를 지음 |
| 1907. 7 | 용산에 여단사령부 설치(헤이그 특사 사건 수습, 의병 봉기 진압 목적) |
| 1908. 6-10 | 용산기지 내 용산보병연대 병영 준공 기지 내 수병원 준공, 오포대 설치 한국주차군사령부, 남산 필동에서 용산기지로 이전 |
| 1909. 9 | 용산기지 내 육군위수형무소 준공 |
| 1910. 8 | 한국병합 강제 조인 |
| 1914. 3 | 용산기지 준공보고서 발간 ‘조선주차군 영구병영관아 및 숙사건축경과개요’ (조선주차군 경리부) |
| 1915. 8-12 | 용산기지 확장공사 개시 한반도 일본군 제19, 20사단 상주군 설치 결정(한반도 지배력 장악, 대륙침략의 거점 확보) |
| 1918. 6 | 조선주차군사령부에서 조선군사령부로 개칭(1945년 2월 다시 바뀜) |
| 1920. 3-4 | 용산 보병 제79연대, 야포병 제26연대 병영 준공 용산 기병 제28연대, 공병 제20대대 병영 준공 |
| 1923. 3 | 용산기지 2차 보고서 발간 ‘조선사단영사건축사’(조선군 경리부) |
| 1925. 7 | 을축년 대홍수, 용산기지 일부를 개방하여 이재민 수용 |
| 1928 | 용산 철도병원 본관(구 철도국 서울진료소) 지점 |
| 1931. 9 | 용산기지 일본군, 만주 침략 선봉 |
| 1932. 5 | 용산 제20사단 소속 56용사 초혼제(용산 연병장) |
| 1935. 11 | 용산 제78연대 내 만주사변 전사자 충혼비 설치 |
| 1937. 10 | ‘황국신민서사’ 제정 |
| 1938. 2 | ‘조선 육군 특별지원령’ 공포 |
| 1938. 5 | ‘국가총동원법’ 공포 |
| 1938. 7 |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창립 조선군사령부 병사부 설치(조선 청년들의 전쟁동원 담당) |
| 1940. 4 | 용산기지 내 경성육군병사부 건물 신축 |
| 1942. 5 | 일본 각의, 조선인 징병제 결정 |
| 1942. 9 | 연합군 포로수용소 개설(현 용산구 신광여중고 부지) |
| 1944. 6 | 조선군보도부, 영화 ‘병정님’ 개봉(용산기지에서 촬영) |
| 1945. 9 | 9 미24군단 예하 제7사단 용산기지로 진주 미군 총사령부, 일본군 본국 철수계획 지시 미군정청 실시 |
- 우리 땅에 주둔한 일본군은 한국주차군(1904∼1910), 조선주차군(1910∼1918), 조선군(1918∼1945.2), 제17방면군(1945.2∼1945.8)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청와대가 있는 경복궁은 우리 황실이 있던 곳이고, 용산은 일제 총독이 있던 곳이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