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 하동 궁항마을 순례자 쉼터를 추억하며.
지리산둘레길 위태~하동 구간을 걷다 보면 궁항마을을 지나게 된다. 행정구역으로는 경남 하동군 금성면 궁항리다. 위태에서 출발하여 작은 고개 두 개를 연거푸 넘어 내려오면 푸른 논밭과 함께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는 궁항마을에 닿는다.

2019년 9월, 낮에는 아직 여름 못지않은 더위로 이마와 옷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쉴 자리가 절실할 때, 마을회관 벽에 걸린 ‘지리산둘레길 새참 사랑방(지리산둘레길 순례자 쉼터 2호)’이라 적힌 이름 판을 발견했다. 이전에 한 번 쉼터를 거쳐 온 적이 있어서 이곳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곳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마을회관 옥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자, 옥상에 철제 구조물로 지붕을 하나 더 올려 햇볕을 가린 널찍한 공간이 있었다. 평상과 냉장고, 싱크대, 가스레인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지붕을 떠받치는 철제 프레임에는 마을의 지난 시간을 알 있는 사진 액자가 줄지어 걸려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옛 사진을 모아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졸업식, 수학여행, 결혼식, 마을 체육대회 등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고향 마을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들이 색바랜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지리산둘레길이 등산이나 다른 숲길과 다른 것에는 걷는 길에서 만나는 마을마다 가진 저마다의 역사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 만남은 늘 따뜻하고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어떤 곳에서는 살육의 역사를 만나게 되고 또 어떤 곳에서는 파괴의 현장과 드러난 상처에 흠칫 놀라게 된다. 하지만 이날처럼 내가 살아온 공간, 시간, 사람과 닮은 마을은 그 자체로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쉼터는 지어진 지 얼마 안 지났는지 아직 평상의 나무와 벽을 칠한 페인트 향이 남아 있다. 아침부터 과자 조각 몇 개가 먹은 전부이고 비와 땀에 젖어 있던 탓에 뭔가 따뜻하게 배를 채울 것이 필요했는데, 마침 싱크대 아래 라면 상자가 보였다. 냄비와 그릇, 젓가락이 깨끗이 준비되어 있었다. 후원함(돈통)에 라면값을 넣고 서둘러 냄비에 물을 받아 끓였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시원한 음료수와 김치도 있었다. 기대하지 않은 선물을 갑자기 받은 느낌이었다. 콜라 한 개와 김치를 꺼내고 콜라값에 약간의 후원금을 후원함에 넣었다(현금이 없으면 적혀 있는 은행 계좌로 돈을 이체할 수 있다). 이보다 더 맛있는 라면이 있을 수 있나. 달걀이나 파는 없이 라면만 달랑 넣고 끓였지만, 멀리 안개에 쌓인 산자락과 논, 밭 풍경을 보며 김치를 얹어 먹는 라면은 꿀맛 그 자체였다.

라면을 먹고 평상에 누워 살갗을 스치고 가는 가을바람과 장난치다 살짝 잠이 들었다. 몇 분 안 되는 짧은 잠이었지만 온몸이 개운하고 다시 걸을 힘이 솟았다. 이런 쉼터가 길을 걷는 중간중간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리산둘레길을 걷다 보면 해는 지는데 잠을 잘 곳이 없거나, 종일 식당이나 구멍가게 한 곳 만나지 못하는 구간도 있다. 미리 그날 밤 묵을 민박집을 찾아 전화로 예약을 하지만 간혹 하루 걷고 쉬어야만 하는 곳에 민박을 운영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먹을 것이나 물을 살 곳이 없는 곳도 있다. 수요와 공급의 논리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둘레길을 걷는 사람만을 위해 식당이나 가게, 숙소를 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민간에서 숙박과 식사, 빨래를 해결할 수 있는 알베르게를 운영하면 지방정부에서 상응하는 보조를 해주는 제도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이런 정책이 순례길로 사람들이 찾고 관광 산업을 활성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간단히 생각할 문제는 아니지만 궁리와 연구가 필요하다.
궁항마을 순례자 쉼터에서 나는 ‘완벽하게’ 쉴 수 있었다. 작년 가을 지리산둘레길을 걷다 순례자센터에서 일하시는 분께 순례자 쉼터가 지금도 잘 운영되는지 여쭤본 적이 있다. 그런데 놀라운 대답을 듣게 됐다. 궁항마을 순례자 쉼터는 얼마 운영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유를 들어보니 기가 찼다. 쉼터는 무인으로 운영하는데, 라면과 음료수를 먹고 값을 치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늘 적자였고, 심지어는 후원함의 돈을 꺼내가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쉼터 역시 같은 이유로 없어졌다고 한다. 좋은 취지로 시작한 쉼터가 양심 없는 사람들로 인해 사라졌다니, 지리산둘레길 순례자라면 최소한 어느 정도의 도덕과 상식을 가졌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바람에 휙 꺼져버린 촛불처럼 사라며 마음이 아팠다. 이런 일을 겪게 되면 누구도 다시 쉼터를 만들자는 말을 할 수 없다. 나쁜 학습 효과는 좋은 학습 효과보다 영향이 훨씬 커서 돌이키기 어렵다.
궁항마을 사람들은 사람의 선함과 양심을 지나치게 믿었던 게 아닐까. 일본 시코쿠 온헨로 순례길에는 궁항마을 쉼터처럼 냉장고, 조리도구, 누워 잘 수 있는 근사한 쉼터는 아니라도 작은 쉼터를 많이 설치하였다. 또 일부 주민들이 적은 비용으로 잠만 잘 수 있는 숙소를 운영하기도 한다. 물론 무인 운영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선과 악, 강함과 약함이 모두 있기 때문에 양심과 자발성에만 의지하는 것은 애초에 계속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적절한 통제가 수단이 같이 있어야 양심과 자발성의 힘도 발휘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지리산둘레길 전체 구간이 개통된 지도 10년이 넘었다. 지리산둘레길이 길을 걷는 사람과 길에 있는 마을 주민에게 서로 어떤 영향을 끼치고, 무엇이 필요하고 고쳐져야 하는지 이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좋은 점과 나쁜 점도 알았고, 해보았더니 잘 되는 것과 잘되지 않은 것도 알았다. 그리고 여전히 이곳에 사는 사람과 찾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길을 찾는 사람들은 잠시 머물다 간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잠깐이 아니다. 이제까지는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그것도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더 큰 관심이 필요하다. 지리산둘레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좋은 영향이 있지 않고, 이들이 지지하지 않는다면, 길은 더 유지될 수 없다. 아무도 반기는 이 없는 곳을 찾아갈 사람은 없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지혜를 모은다면 앞으로 10년 후에는 지난 10년보다 더 나은 결실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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