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 여러 해 전 늦가을
- 이날 걸은 길: 화양동 탐방지원센터-첨성대-도명산-낙영산-무영봉-가령산-자연휴게소-학소대-화양동 탐방지원센터
속리산 국립공원에는 문장대, 천왕봉을 오르는 코스 말고도 여러 등산 코스가 있다. 화양계곡을 따라 늘어선 도명산, 낙영산, 가령산을 한 바퀴 둘러오는 코스가 있으니, 산을 좀 다닌다는 사람들은 ‘가무낙도 종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는 사실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코스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걷다 보니 그 길을 걸은 적이 있다. 단풍철이면 사람들로 북적이는 법주사에서 오르는 길이 아닌 한적한 곳을 찾다 보니 도명산과 친하게 되어 몇 번을 오른 적이 있다. 화양계곡을 따라 걷는 길은 산과 물이 맞닿아 있고 경치가 아름다워서 조용히 생각에 잠겨 걷기 참 좋았다. 그러다 경사길을 오르기 시작해 천천히 쉬엄쉬엄 걸어 두어 시간이면 도명산 정상에 이른다. 등산과 산책을 겸해 하루에 다녀오기가 이보다 나은 곳도 흔치 않다.
여러 해 전 이야기다. 단풍 구경도 끝물이라는 늦가을 더 늦기 전에 단풍 구경을 할 심산으로 도명산을 찾았다. 단풍으로 이름 있는 곳은 많았으나 사람을 피해 갈 곳으로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도명산이다.
화양동 탐방지원센터 앞 너른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이정표를 찾을 것도 없이 포장도로 양옆으로 키 큰 가로수가 무성한 잎으로 만든 터널을 걷게 된다. 산에 갈 목적이 아니라 이 길을 걷기 위해서라도 올 만한 곳이다. 가까운 곳에 이런 길이 있다면 매일 걷고 싶을 것이다.

첨성대, 금사담, 암서재, 운영암과 같이 기묘한 모양의 바위를 구경하며 맑은 물을 따라 낙엽 쌓인 길을 걷다 보면 도명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에 이른다. 오르는 길은 시작부터 경사가 꽤 있다. 걷던 속도대로 오르다 보면 금세 숨을 헐떡이게 되고 몸에선 무리하지 말라고 신호를 보낸다. 여기서 쉬엄쉬엄 올라야 한다. 여기를 잘 넘기면 그다음부터는 큰 어려움 없이 수월하게 도명산 정상까지 갈 수 있다.
도명산은 속리산 자락의 산이다. 짐작하겠지만 바위가 많고 그러다 보니 경사가 급한 곳, 바위 사이를 이은 계단이 중간중간 꽤 많다. 산은 어려움만 주지 않으니 경삿길, 계단을 오른 다음에는 눈앞을 가로막는 것이 하나 없는 풍광을 선물한다. 도명산을 오르내리는 중엔 이런 선물을 많이 받게 된다. 산에 오르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도명산 정상은 커다란 바윗덩어리다. 그래서 경치를 가로막는 나무가 없다. 낙영산, 무영봉, 가령산이 지척으로 보이고, 날씨만 좋다면 속리산 문장대, 천왕봉, 관음봉뿐 아니라 칠보산, 대야산까지도 이어진 산줄기를 볼 수 있다.
낙영산까지는 숲이 우거진 계곡 길을 지나야 한다. 오르락내리락을 몇 번 반복하면 낙영산에 이른다. 낙영산 정상에서는 나무에 가려 주변 경치를 볼 수 없다. 능선을 따라 한 시간가량 가면 무영봉에 이르는데, 여기는 조그만 표지석만이 무영봉임을 알려줄 뿐 주변 경치를 보기도 어렵고 쉴 공간도 마땅치 않다.
경삿길과 철계단을 오르고 내리고 반복하다 보면 능선을 따라 한참을 걷게 된다. 가령산 정상도 나무에 가려 주변 경치를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산에서 내려가다 보면 눈앞이 환히 열리는 곳을 여러 번 마주하게 된다. 거북바위 가까운 곳에서 보는 경치도 빼어나서 땀을 식히며 한참을 구경하게 된다. 뒤를 돌아보면 지나온 봉우리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제는 내리막이 길게 이어진다. 꽤 지루한 길이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 아니다 보니, 길은 낙엽에 가려 신경 쓰지 않으면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길을 잃은 것은 아닌지 표지판을 둘러봐도 보이지 않아 걱정할 즈음 멀리 계곡물 소리가 들린다. 반가운 마음에 내려가면 화양계곡을 만나는데, 어디를 봐도 건널 다리는 보이지 않는다. 잘못된 길로 내려온 줄 알았다. 난 이곳에 다리가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징검다리도 없고 꽤 넓은 내를 어쩔 수 없이 물에 빠져 건널 수 밖에 없었다. 발아래 밟히는 바위와 돌은 이끼가 끼어 미끄럽기 그지없었다. 등산화를 신은 채 조심하며 발걸음을 옮기지만 한 번 밟히는 돌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가슴까지 다 젖고서야 내를 건널 수 있었다.
내를 건넌 곳에 자연휴게소, 자연학습원이 있다. 여기서부터 출발한 화양계곡 탐방 안내소까지는 긴 포장도로를 걸어야 한다. 걷는 내내 계곡과 나무 그늘이 있는 것이 다행이다.
산길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막상 걸어보니 지도에 표시된 거리와 실제 걸은 거리는 꽤 차이가 있었다. 시간도 예상보다 한 시간쯤 더 걸렸다. 그리고 화양계곡을 물에 빠져 건너는 듯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어느 산을 가더라도 징검다리라도 있지 다리 없는 곳을 건너는 코스는 본 적이 없다. 산행 전 충분히 지형과 코스를 알아보지 않는 잘못을 한 대가를 치렀다.
가무낙도 종주를 할 때는 내가 간 길 반대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를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계곡물이 불어나 있었다면 나는 산에서 내려와 내를 건너지 못하는 낭패를 겪었을 것이다. 이날 산행으로 나는 등산에 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위험에 관한 최소한의 의식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무모한가.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자세히 알아야 한다. 알지 못하면 위험하고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고산등반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즐기는 정도의 등산에 필요한 지식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이때 하게 되었다. 이날의 경험이 계기가 되어 국립등산학교에서 공부하고 숲길등산지도사 자격도 얻게 되었다.
우암 송시열은 화양계곡에 발만 담그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도명산에도 올라 내가 본 것을 보며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번잡할 때면 찾아 마음을 내려두고 들여다보기 좋은 곳이다. 계곡과 산이 마음을 닦고 씻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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