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나?
그 사람을 생각하면 늘 같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나?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 그때마다 다른 이미지가 떠오르나?
내게 어떤 사람은 생각하면 늘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다음은 다를지라도 늘 같은 이미지로 시작한다. 그 사람의 얼굴일 수도 있고 그 사람과의 어떤 기억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생각할 때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왜 그런가? 나는 하나인데 왜 사람들은 내게 다른 모습으로,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고 다시 떠올려지는가?
기억 속 사람들을 한명 한명 떠올려 보았다. 할 수 있는 한 많이. 내가 오래 기억하고, 기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늘 같은 표정, 같은 모습으로 생각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 않고 내게 그리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은 사람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여기에 속하지 않았다. 매번 다른 모습으로 떠오르지만, 마음에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도 있다.
나는 심리학자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라서 그 연유를 알지 못한다. 요즘엔 꽤 똑똑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공지능이 많으니, 그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다.
그럴지라도 참으로 신기하고 궁금하다.
어떤 사람, 그 사람은 내게 그 사람만의 독특함으로 기억되고 그 사람과의 대화와 경험, 감정으로 제각 다르게 기억된다.
그리고 다시 끄집어내는 그에 대한 기억은 기억 그 자체만큼이나 다르게 떠올려진다.
왜일까.
수십 년이 지나도 늘 똑같은 장면으로 기억이 시작되는 사람이 있다. 사실 그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다. 그런데 그는 늘 같은 표정, 같은 순간, 같은 공간에서 날 바라보고 있다.
이른 아침마다 그 집 앞을 달려갈 때 장미 덩굴이 아직은 성긴, 아직은 멋들어지지 않은 울타리인 그곳에서 한 손에 전정가위를 들고 아침 햇살이 이마에 반사되어 작게 돋보이는 금테 안경을 걸친 온화한 미소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인사를 건네던 분. 지금은 아마 하늘에 계실 그분을 나는 늘 같은 장면으로 만난다.
시내버스 안. 학교로 향하는 버스 안 그녀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매달린 손잡이를 한 손으로 잡고 눈은 창밖에 고정되어 있다. 내 눈은 그녀의 옆얼굴과 창밖 풍경을 번갈아 가며 보고 있다. 이마부터 콧등, 입술, 턱으로 이어져 목덜미를 타고 내려오는 곡선을 유심히 기억하려고 했다. 연습장 종이 위에 그 선을 옮겨 그리며 그녀의 옆얼굴을 떠올렸다. 내 기억 속 그녀는 늘 그 장면에만 존재했다. 그게 전부다.
사람의 기억은 갖고 있는 기억의 풍부함에 비례하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아버지. 내게 떠오르는 아버지의 첫 이미지는 입을 다물고 있는 표정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무표정하게 있는 얼굴. 그것이 매번 떠오르는 기억이다.
아버지가 날 안아준 기억이 없다. 내게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고 말해준 기억이 없다. 아버지 등에 업힌 기억이 한 번 있다. 비가 많이 내려 불어난 개울을 아버지 등에 업혀 건넌 기억이 있다. 그게 유일하다. 내게 아버지는 늘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처럼 무표정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리 닮고 싶지 않았던. 매일 아침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본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 거울에 아버지가 있다. 내 얼굴에서 아버지를 본다. 싫다. 싫었다.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익숙해지기도 한 것 같다.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대학 동기 친구가 있다. 눈꼬리가 처져서 늘 슬퍼 보이기도 하고 착해 보이기도 했던 친구. 내 피부가 여자인 제 피부보다 좋다고 손으로 꼬집으며 바꾸자고 하던 친구. 그 친구 마음엔 슬픔도 많고 분노도 많고 사랑도 많아서 나는 늘 그 친구 보기가 불안불안했다.
가슴 속 감정을 주체 못해 자주 울기도 하고 자주 술 주정도 하던.
그 친구는 내게 늘 “파가니니가 날 겨우 진정시켜 주었어.”라고 말하던 얼굴로 떠오른다. 아마 내가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떠올리는 날도 내게 그렇게 말할 것이다. “파가니니 때문에 숨을 쉴 수 있었어.”라고. 숨이 쉬기 힘든 날이면 그 친구의 말과 얼굴이 떠오른다.
사람과 인연을 만든다는 것. 친구로, 연인으로, 직장 동료로, 같은 업계 종사자로. 내 의지에 의한, 그리고 내 의지와는 무관한 많은 인연. 몇 해 전부터 인연의 무게가 버거워졌다. 휴대전화 주소록 이름의 절반의 사람들. 난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와 어디서 이름을 주고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허전하다.
휴대전화 진동으로 누군가의 부고를 받는다. 이름을 확인하고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절을 한 후 식탁에 앉아 소주를 한 잔 따른다. 그와의 기억을 떠올리지만, 기억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짧고 깊지 않은 그와의 인연에 잔을 올린다. 내가 떠나는 날 누군가 날 이렇게 기억하고 소주를 따라주겠지.
이제는 더는 인연을 만들지 말자고 생각했다. 업을 쌓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되는 일이던가. 처음부터 내겐 그런 능력이 없었다. 만들 수도, 떠날 수도 없다. 다 아는 것인데도 허망한 다짐을 하곤 했다.
난 누군가에게 한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고, 누군가에는 쓸쓸히 술잔을 기울이게 되는 얼굴로 기억될 것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일 것이다.
어쩌겠는가. 그리되어야 하기에 그리되는 것이다.
떠올리면 떠오르는 그 모습, 그들과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그 기억과 장면에 그들이 있기도 하지만 그곳에 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그 기억 속의 내가 아니다.
나의 열두 살은 열두 살 적 나에게, 나의 스물두 살은 스물두 살이었던 내게, 나의 예순두 살은 예순두 살의 내게 있는 것이다.
그걸로 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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