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구례 화엄사에서 산 위로 난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지붕 낮은 건물 몇 채가 이어진 구층암에 이르게 된다.
구층암은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건축에서 창의력이 돋보이는 건물로 유명하다. 집 짓는 재료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모과나무를 지붕을 떠받치는 기둥으로 쓴 건물이 있기 때문이다. 모과나무는 곧고 길게 자라지 않는다. 옆으로도 휘고 겉도 울퉁불퉁하다. 화엄사를 둘러보면 알게 되지만 이곳엔 모과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암자 건물을 지으며 수백 년 묵은 모과나무를 잘라 겉도 다듬지 않고 그대로 기둥으로 쓰는 것은 참으로 멋스럽지 않은가. 상상력과 창의력이 놀랍다. 모과나무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천불전 옆에는 또 다른 모과나무가 지금도 풍성하게 잎을 드리우고 열매를 맺고 있다. 덕분에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이 아름다운 암자를 찾아 멋진 예술을 음미할 수 있다.
구층암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차’다. 구례는 바로 옆 하동과 더불어 우리 차로 유명한 지역이다. 두 지역이 서로 자기들 차가 더 낫다고 자랑한다. 섬진강을 따라 볕이 잘 드는 산자락에 정갈하게 줄지어 자라는 차밭이 바로 하동 차 재배지다. 그런데 구층암 차밭은 이와는 다르다. 암자 옆 산으로 들어가면 크고 작은 나무, 대나무 사이에서 키 작은 차가 함께 자라고 있다. 차나무라고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니고 다른 나무와 햇볕을 더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어울리며 자란다. 구층암 차는 이렇게 자란 잎으로 만든 차다.
구층암에서 차를 기르고 만드는 덕제스님은 TV, 신문, 잡지에도 여러 번 기사가 실려 아는 사람이 많다. 따로 광고를 하지 않아도 스님과 차를 알게 된 사람들이 도시에서 먼 이 작은 암자까지 차를 사러 온다.
암자 입구 계곡 옆에 작은 정자가 있다. 이곳에서는 구층암 차를 언제나 마셔볼 수 있다. 구층암 차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녹차와 같은 방식으로 만든 덕음차와, 발효차, 덕음차와 발효차의 중간인 청차 세 가지가 있다. 발효차는 녹차 고유의 떫은맛이 나지 않아 차향을 더 음미할 수 있다. 사람의 취향이 다르겠지만 내겐 발효차가 더 편안하고 더 좋았다.
몇 년 전 지리산둘레길을 며칠 걷고 유명하다는 모과나무 기둥을 보러 들렀다 알게 된 구층암 죽로야생차. 이번에도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들러 차방 처사님과 한참 동안 차를 마시며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 파란 조끼와 챙 넓은 모자를 쓴 여럿이 찻잎 따는 작업을 나가려고 모였다. 금발, 갈색의 외국인도 몇 명 있었다. 그중 프랑스에서 온 한 젊은이는 작년부터 이곳에 머물며 암자 일을 거들고 차를 만든다고 했다. 그녀가 그린 수채화로 달력을 만들었는데 그림 솜씨가 제법이다. 처사님 얘기를 들으니 매년 4~6월에 차 만들기 체험을 할 수 있단다. 다음에는 나도 직접 찻잎을 따고 공을 들여 차를 만들어 봐야겠다.
나는 사기로 만든 다기 세트를 갖고 있지 않다. 번거롭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 전통을 가장한 일본식 차 예법에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 난 거름망에 찻잎 몇 장을 넣고 찻잔에 뜨거운 물로 우려내서 마신다. 그것도 귀찮으면 주전자에 넣고 보리차처럼 마신다. 편안한 게 최고다. 구층암과 그곳 사람들처럼.
암자와 차나무, 차, 사람 모두 닮아 있고 향기롭다. 구층암 죽노야생차를 마시면 언제나 향기로운 그곳과 사람들이 떠오른다.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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